
'셰이프 오브 워터'는 괴물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영화이다. 또한 이 영화는 인간이 가진 깊은 고독, 정체성, 타자성, 연결 욕구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글은 말할 수 없는 여성 엘라이자와 인간도 아닌 존재인 수중 생명체가 서로를 통해 어떻게 자아를 찾고 치유되는지 분석한다.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연결될 때 어떤 심리적 회복이 일어나는지, 왜 타자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 되는지, 권력과 폭력과 배제 구조가 인간의 내면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해석한다. 이번 글에서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주제, 타자성, 연결 욕구에 대한 심리를 분석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주제
셰이프 오브 워터는 겉으로 보기에는 '괴물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판타지적 서사를 담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 작품의 중심에는 철저하게 고독한 두 존재가 있다. 엘라이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여성이다. 그녀는 일상 속에서 항상 조용하며, 사회는 그녀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누구도 그녀의 감정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녀를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의 일상은 반복되고, 그 반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존재감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한편, 수중 생명체 역시 같은 방식으로 고립된 존재다. 그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생명체이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문명 세계와 연결되지 않은 채 태어난 존재이다. 그는 연구소에서 '위험한 대상', '실험체', '연구 가치가 있는 괴물'로만 취급된다. 즉, 인간 사회에서 그는 철저히 대상화된 존재이며, 존재 자체가 이해 불가능한 '타자'로 취급된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존재가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를 단순한 감정이 아닌 '고독의 친연성'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종종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존재에게 강하게 끌린다. 상처는 연결을 만든다. 고독은 다리를 놓는다. 서로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이 두 존재는, 서로에게서 말보다 깊은 이해와 공명을 느낀다. 즉, 두 존재는 서로에게서 세상이 금지한 감정을 발견한다. 영화 제목인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는 중요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은 특정한 형태가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사랑의 기준을 만들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올바른 사랑과 틀린 사랑을 구분하지만, 영화는 그 규범 자체가 얼마나 좁고 폭력적인지를 비판한다.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고, 사랑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은 타자를 이해하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즉, '사랑은 물처럼 규범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만나 만들어지는 흐름이다.'라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이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전통적인 사랑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바라보고 인정하는 깊은 연결의 감정이며, 그 감정이 왜 가장 인간적인 형태의 사랑인지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전통적 의미의 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외모, 언어, 종족, 규범'을 넘어선, 존재의 깊은 인정과 연결에 대한 이야기다. 엘라이자와 수중 생명체의 관계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 둘의 연결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판단하지 않는 용기, 고독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기반으로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본질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타자와의 연결이 인간을 어떻게 치유하고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은 그 사람의 형태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의 고독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다.
타자성
이처럼 이 영화는 상처받은 존재들이 서로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각 인물의 타자성, 고독, 욕망을 보여준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주인공인 엘라이자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의 태도이다. 그녀는 존재 자체가 배제된 상태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사랑을 건네는 방식이 사회적으로 '비정상'으로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가진 장애만 보고, 그녀가 어떤 감정을 가진 사람인지를 보지 않는다. 즉, 엘라이자의 고독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지 않는 사회' 때문이다. 하지만 엘라이자는 사랑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누구보다 풍부한 인물이다. 말 대신 행동으로, 분위기로, 눈빛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을 억압하는 세계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지만, 그 조용함은 결코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의 억눌림이다. 엘라이자가 수중 생명체에게 끌리기 시작한 이유도, 그가 그녀의 감정을 가로막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른 등장인물인 수중 생명체의 타자성은 인간이 정의할 수 없는 존재의 힘에 있다. 수중 생명체는 인간의 세계에서 완벽한 타자다. 그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며, 인간 사회의 규범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이 존재를 괴물이라 부르고, 가두고, 실험하고, 통제한다. 타자성은 인간 사회에서 종종 배제의 근거가 되지만, 동시에 엘라이자에게는 매력과 해방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의 타자성은 엘라이자에게 '자신을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사회가 엘라이자를 판단하듯이, 이 생명체도 사회에 의해 판단당하지만 그 둘 사이에서는 어떤 판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두 존재 사이에 강한 연결을 만든 핵심 서사이다. 이 영화는 타자를 향한 권력과 폭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 속 스트릭랜드는 권력의 화신이다. 그는 타자를 억압하고 통제하려 하며, 엘라이자와 생명체의 관계를 '이상하고 불순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는 세계가 정한 규칙과 정상성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으며, 그 기준을 벗어나는 것은 모두 파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스트릭랜드가 상징하는 것은 결국 '권력적 정상성'이다. 이 정상성은 사랑을 억압하고, 존재를 통제하고, 타자를 말살하려 한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스트릭랜드의 폭력을 무력화시킨다. 이는 타자가 결코 권력의 기준으로만 정의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연결 욕구 심리
다른 사람들에게 '쇼핑 카트에 담긴 물건'처럼 취급되는 수중 생명체와, '조용한 노동자'로만 보이는 엘라이자는 '세계에 의해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사회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에서 살아간다. 그런 삶은 사람에게 깊은 고독을 남긴다. 이 두 존재가 서로에게 끌린 이유는 사랑의 감정만이 아니라, 서로가 가진 상처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 그 침묵 속에 흐르는 깊은 감정이 두 존재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본다. 두 존재는 서로의 고독에 공명한다. 두 존재는 이 고독을 사랑으로 채운다. 두 존재는 서로에게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엘라이자와 수중 생명체의 관계를 단순히 육체적 욕망으로 축소해 해석하는 것은 영화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두 존재는 언어로 소통할 수 없지만 감정은 서로를 향해 흐른다. 욕망은 단순히 육체적 충동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방식이다. 누군가에게 욕망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엘라이자가 생명체와 완전히 연결되는 장면에서, 영화는 사랑을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감각으로 보여준다. 그 사랑은 사회적 조건이나 규범을 뛰어넘으며,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이자 깊은 치유다.